달력

42024  이전 다음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form>

 

<input type="hidden" name="_var">

<input type="hidden" name="_var">

 

 

이렇게 두개 선언해 놓고... 자스에서

_var.value.split(";"); 하니... 에러가 안나냐 ㅡㅡ

 

시간 아까워라 ㅠㅜ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3400 히트 이벤트!!!  (0) 2004.11.09
[펌] (동영상모음) 어리버리한 빼꼼씨리즈  (0) 2004.11.09
3300 히트 이벤트!!!  (0) 2004.11.03
3200 히트 이벤트!!!  (2) 2004.10.26
3100 히트 이벤트!!!  (0) 2004.10.18
Posted by tornado
|
[방문히트이벤트] 3300 히트를 잡아라!
버들피리님이 당첨되었습니다.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동영상모음) 어리버리한 빼꼼씨리즈  (0) 2004.11.09
오늘의 삽질..  (0) 2004.11.04
3200 히트 이벤트!!!  (2) 2004.10.26
3100 히트 이벤트!!!  (0) 2004.10.18
[펌] 옥션판매자와 구매자간의 대화  (0) 2004.10.08
Posted by tornado
|
[방문히트이벤트] 3200 히트를 잡아라!
godflesh님이 당첨되었습니다.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삽질..  (0) 2004.11.04
3300 히트 이벤트!!!  (0) 2004.11.03
3100 히트 이벤트!!!  (0) 2004.10.18
[펌] 옥션판매자와 구매자간의 대화  (0) 2004.10.08
[펌] ㄴ ㅏ무심는 노인  (0) 2004.10.08
Posted by tornado
|
[방문히트이벤트] 3100 히트를 잡아라!
안심지기님이 당첨되었습니다.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3300 히트 이벤트!!!  (0) 2004.11.03
3200 히트 이벤트!!!  (2) 2004.10.26
[펌] 옥션판매자와 구매자간의 대화  (0) 2004.10.08
[펌] ㄴ ㅏ무심는 노인  (0) 2004.10.08
[펌] 뻘쭘 ㅊ ㅣㅌ ㅏ~  (0) 2004.10.08
Posted by tornado
|

 

[물품명/경매번호] : 파리의 연인!!!! 의상협찬.. 최고급 기주(박신양) 착용 의류!

 

구매자 ID :arttra 2004-07-14

 

[구매자] : 이 추리닝이 뭔 빠리에 연인 의상 협찬이냐 이 사기꾼아.

 

[판매자] : 김정은 작은 아버지가 줄곧 입은 거고 기주도 딱 1분 입었어요

 




 

[물품명/경매번호] : 매그너스 2003년형 4만키로! 구매자 ID :arttra 2004-06-14

 

[구매자] : 여자 귀걸이 하나. 좌석뒤에 빤스. 콘돔 한개 쓴거와 안쓴거! 너때문에 나

 

애인하고 죽으라 싸웠다. 청소도 안하고 파니?

 

[판매자] : 앗! 더 잘 찾아보세요! 몇개 더있을텐데....;


 



 

[물품명/경매번호] : 신경통 전용 샤워기 구매자 ID :8019rlsid 2004-06-13

 

[구매자] : 앞이빨이 두개가 나갔다 이색희야! 이거 사람잡는 수압이네.

 

[판매자] : 이빨에 신경통있었어요? 왜 이빨에 대요! 그걸..


 



 

[물품명/경매번호] : 모타 사이클 가죽 레자 바지 구매자 ID :arttra 2004-09-14

 

[구매자] : 입은뒤에 벗을 수가 없다. 찢으면 반품도 안될꺼고. 이게 고무지 가죽이냐

 

워메 이일을 어쩐데

 

[판매자] : 직접 입고 오세요. 찢지 마시고요. 제주도거든요? 비행기 예약후 메일 주세요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3200 히트 이벤트!!!  (2) 2004.10.26
3100 히트 이벤트!!!  (0) 2004.10.18
[펌] ㄴ ㅏ무심는 노인  (0) 2004.10.08
[펌] 뻘쭘 ㅊ ㅣㅌ ㅏ~  (0) 2004.10.08
3000 히트 이벤트!!!  (8) 2004.10.08
Posted by tornado
|
 
 
오 ㅐ 심은거야?
 
ㅡ_ㅡ;;;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3100 히트 이벤트!!!  (0) 2004.10.18
[펌] 옥션판매자와 구매자간의 대화  (0) 2004.10.08
[펌] 뻘쭘 ㅊ ㅣㅌ ㅏ~  (0) 2004.10.08
3000 히트 이벤트!!!  (8) 2004.10.08
[펌] 허걱 -.-;  (0) 2004.10.07
Posted by tornado
|
 
 
 
 
 
뻘쭘하다...
 
인생 헛산거 같지?
 
ㅡ_ㅡ;;;
Posted by tornado
|
[방문히트이벤트] 3000 히트를 잡아라!
스킬님이 당첨되었습니다.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ㄴ ㅏ무심는 노인  (0) 2004.10.08
[펌] 뻘쭘 ㅊ ㅣㅌ ㅏ~  (0) 2004.10.08
[펌] 허걱 -.-;  (0) 2004.10.07
[추억의 사투리]이율곡 선생의 십만 양병설  (0) 2004.10.07
jsp/html 파일이 이리 많았나??  (0) 2004.10.07
Posted by tornado
|
 
 
정말 허걱이네 ㅡㅡ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뻘쭘 ㅊ ㅣㅌ ㅏ~  (0) 2004.10.08
3000 히트 이벤트!!!  (8) 2004.10.08
[추억의 사투리]이율곡 선생의 십만 양병설  (0) 2004.10.07
jsp/html 파일이 이리 많았나??  (0) 2004.10.07
2900 히트 이벤트!!!  (0) 2004.10.01
Posted by tornado
|

 

율곡 선생님의 고향이 강원도 강릉입니다.


"전하! 자들이 움메나(얼마나) 빡신지(억센지)


영깽이(여우)같에 가지고 하마(벌써)


서구문물을 받아 들여 가지고요


쇠꼽 덩거리(쇠 덩어리)를 막 자들고


발쿠고(두드리고 펴고) 이래 가지고 뭔 조총이란걸 맹글었는데


한쪽 구녕(구멍) 큰데다가는 화약 덩거리 하고


재재한 쇠꼽 덩거리를 우겨 넣고는


이쪽 반대편에는 쪼그마한 구녕(구멍)을 뚤버서(뚫어서)


거기다 눈까리(눈알)를 들이대고


저 앞에 있는 사람을 존주어서(겨누어서) 들이 쏘며는


거기에 한번 걷어 들리면(걸리면)


대뜨번에(대번에) 쎄싸리가 빠지쟌소(죽지 않소).


그 총알이란게 날아 가지고


대가빠리(머리)에 맞으면 뇌진탕으로 즉사고요


눈까리(눈알) 들어 걸리면 눈까리가 다 박살나고


배떼기(배)에 맞으면 창지(창자)가


마카(모두)게 나와 가지고(쏟아져 나와서)


대뜨번에(대번에) 쎄싸리가 빠져요(죽어요).


그리고 자들이 떼가리(무리)로 대뜨번에(대번에) 덤비기 때문에


만명. 2만. 5만 갖다가는 택도 안돼요(어림도 없어요).


10만 이래야(10만 정도는 되어야) 되요.


분명히 얘기하는데 내 말을 똑떼기(똑바로)


들어야 될 끼래요(될 꺼예요).


그리고 자들이요 움메나(얼마나) 영악스러운지요


순순히 이래 가지고는 되지 않아요.


우리도 더 빡시게 나가고 대포도 잘 맹글고


훈련을 잘 시켜서 이래야지 되지


안 그러면 우리가 잡아 먹혀요.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00 히트 이벤트!!!  (8) 2004.10.08
[펌] 허걱 -.-;  (0) 2004.10.07
jsp/html 파일이 이리 많았나??  (0) 2004.10.07
2900 히트 이벤트!!!  (0) 2004.10.01
MSN 차단!!!!  (3) 2004.09.30
Posted by tornado
|

음... 모가 이리 많지???  모지?? 뭘까??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허걱 -.-;  (0) 2004.10.07
[추억의 사투리]이율곡 선생의 십만 양병설  (0) 2004.10.07
2900 히트 이벤트!!!  (0) 2004.10.01
MSN 차단!!!!  (3) 2004.09.30
연휴가 끝나고...  (0) 2004.09.30
Posted by tornado
|
[방문히트이벤트] 2900 히트를 잡아라!
짱승님이 당첨되었습니다.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억의 사투리]이율곡 선생의 십만 양병설  (0) 2004.10.07
jsp/html 파일이 이리 많았나??  (0) 2004.10.07
MSN 차단!!!!  (3) 2004.09.30
연휴가 끝나고...  (0) 2004.09.30
썩어가는 카메라..  (0) 2004.09.23
Posted by tornado
|

회사 정책상 MSN 은 물론 모든 메신져... 사이월드....  FTP 사이트 등등 해서

모조리 막음 ㅡㅡ;

 

심심해 죽갔네

 

좋은 방법 있음 덧글 주세여~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jsp/html 파일이 이리 많았나??  (0) 2004.10.07
2900 히트 이벤트!!!  (0) 2004.10.01
연휴가 끝나고...  (0) 2004.09.30
썩어가는 카메라..  (0) 2004.09.23
2800 히트 이벤트!!!  (0) 2004.09.22
Posted by tornado
|

연휴 땜시 헤이해 졌던 몸과 마음이 제대로 돌아오려면 월요일은 되어야 할듯 ㅡㅡ

 

 

'이것저것 > 낙서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2900 히트 이벤트!!!  (0) 2004.10.01
MSN 차단!!!!  (3) 2004.09.30
썩어가는 카메라..  (0) 2004.09.23
2800 히트 이벤트!!!  (0) 2004.09.22
[펌] 다시 읽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0) 2004.09.22
Posted by tornado
|

ㅜㅜ 나의 애카(?) 인 딤쥐 쎄븐아이가.... 책상 서랍에서 썩어가구 있어요 ㅠㅠ

 

언제 출사 함 가야하는데 ㅠㅠ

Posted by tornado
|
[방문히트이벤트] 2800 히트를 잡아라!
다복솔님이 당첨되었습니다.
Posted by tornado
|

다시 읽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신동아 2001년 4월호에 게재된 내용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끝까지 참는 자가 이긴다

제1부

냉철한 현실주의자 무인으로 보는 이에야스

제2부

인간경영의 지혜 정치가로 보는 이에야스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바쿠후(幕府)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의 달인. 그러나 상대를 쳐야 할 때는 가혹하게 칼을 뽑아들었다. 한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머리를 숙였고, 이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굴복했으나 일본을 평정한 것은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정치와 경제가 혼미를 거듭하는 지금 한국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냉철한 지혜와 지독한 인내를 배워야 할 것이다.

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인가.

일본에는 15세기 말부터 약 100년 동안 계속된 전국시대가 있었다. 전국에서 300명에 이르는 군웅이 할거하여 각축을 벌이던 난세가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절한 투쟁의 와중에 도태되어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다.

가까스로 천하를 노릴 자리에 도달한 무장은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비롯한 6~7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노부나가와 히데요시는 한때 천하의 패권을 잡았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이에야스였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에야스는 천재적인 자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시대가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남이 견디지 못할 일을 참고,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성취시킨 인내, 고난과 위기 속에서 배양된 지혜, 판단력·행동력·조직력이 그를 천하인(天下人)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승자의 조건이었다.

승자의 조건

작년에 일본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최고라고 꼽는 역사상 인물 중에서 이에야스가 세 번째로 뽑혔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특히 기업인, 경영자, 변혁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신뢰감을 바탕으로 한 그의 인간관계, 강력한 조직력, 그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리더십 등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처세술과도 직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경영의 귀재라는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가 산하에 이에야스를 연구하는 부서를 설치했다는, 얼른 보기에는 기이한 현상도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치가 방향을 잃고 경제가 난관에 처해 있으며 사회가 혼미하다. 이것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난세를 이긴 이에야스의 삶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1부 냉철한 현실주의자-무인으로 보는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542년, 지금의 아이치 현(愛知縣) 지방인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조상은 떠돌이 승려이던 도쿠아미(德阿彌)다. 15세기 초 도쿠아미는 마쓰다이라 마을에 들어와, 지방유지인 마쓰다이라 노부시게(信重)의 사위가 되어 정착했다. 이때 그는 이름을 마쓰다이라 다로사에몬 치카우지(太郞左衛門親氏)로 바꾸었다. 이 치카우지의 9세 손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이에야스의 아명은 다케치요(竹千代)였다.

인질로 출발한 생애

지방 토호로 출발한 마쓰다이라 가문은 전국의 풍운에 편승해 차차 인근 지방을 공략하여 영지를 넓혀갔다. 그러다 7대째인 기요야스(淸康) 대에 이르러 오카자키 성을 본거지로 하여 미카와 일대를 거의 장악하는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확장은 불가능했다. 동쪽에 있는 이마가와(今川), 서쪽에 있는 오다(織田) 양대세력으로부터 잇따라 공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존립마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히로타다 대에 이르러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밑에 들어갔다. 히로타다는 영지 보존을 약속받는 대가로 그의 아들인 다케치요를 인질로 보내게 된다.

다케치요(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질 생활은 처음부터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다케치요를 호송하던 히로타다의 가신이 돈에 매수되어 다케치요를 오다 쪽에 넘기고 만 것이다.

오다 쪽에서는 히로타다에게 사자를 보내 이마가와와 관계를 끊지 않으면 다케치요를 살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히로타다의 대답은 단호했다.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마가와와 맺은 우의를 배신한다면, 미카와 무사로서 체면이 서지 않으니, 다케치요를 죽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진심이 아닐 것이다. 무사의 체면이란 표면적인 구실일 뿐, 사실은 아들의 생명을 잃는 두려움보다도 이마가와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다케치요는 아버지 히로타다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다행히 오다 쪽은 다케치요를 죽이지 않고 연금했다. 그리고 2년 후 이마가와와 인질교환을 하여 그를 석방했다. 그러나 보름 후 다케치요는 다시 이마가와의 거성인 슨푸(駿府)로 끌려가야만 했다. 그 동안 다케치요는 아버지의 변사로 가문을 승계하였으나 성주 신분인 채 12년 동안 인질로 고초를 겪게 된다.

다케치요에게 일대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19세 때다. 그때까지 그는 이마가와의 노예였다. 그와 그의 가신들은 전투가 있을 때마다 예외없이 가장 위험한 최일선에 투입되어 사투를 강요받았다. 요컨대 그들은 이마가와 군의 외인부대로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터에서 그들은 용감했다. 비록 인질이기는 하나 가능한 한 자신의 강인함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2중 3중으로 묶인 속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 반드시 때가 온다고 믿었다. 그가 항상 용감하게 싸운 것은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14년에 걸친 인질 생활은 그에게 놀라운 인내력과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하는 집념을 제2의 천성으로 심어주었다. 강인·용기·검소·침착·극기·결단·신의 등의 덕목을 겸비한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이 모든 것을 소년기의 인질생활을 통해 철저히 체득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절의 이에야스는 반드시 불운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나의 보배는 가신

다케치요가 슨푸에서 치욕스러운 인질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오카자키에 있는 가신들 역시 말할 수 없는 인종과 고통을 강요받고 있었다. 오카자키 성에서 산출되는 쌀은 이마가와에서 파견한 성주 대리가 모조리 슨푸로 실어갔다. 그러므로 주군이 없는 땅에 사는 오카자키의 가신들에게 녹봉이 지급될 리 없었다. 가신들은 신분이 다른 농민과 마찬가지로 괭이와 호미를 들고 땅을 파서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다. 이들은 오카자키 성에 진주해 온 이마가와의 가신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고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이들은 이마가와가 외부와 싸움을 벌일 때마다 선봉에 나서도록 명령받았다. 여기에는 도쿠가와 가신들을 멸절(滅絶)시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신음하는 가신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주군인 다케치요가 인질에서 풀려, 어엿한 영주로서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그들은 곤궁과 비굴로부터 단번에 해방된다. 미카와의 가신들은 그때를 위해 와신상담하면서 끈기 있게 충성심을 연마했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일화다.

다케치요가 13세 때 성묘를 위해 잠시 자기 영지로 돌아온 적이 있다. 고향에서는 80이 넘은 노신 도리이 타다요시(鳥居忠吉)가 그를 맞았다. 어느 날 타다요시는 감시의 눈을 피해 다케치요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다케치요가 들어가니 거기에는 놀랍게도 돈과 식량, 무기가 가득 숨겨져 있었다.

고향의 가신들이 곤궁에 처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다케치요는 깜짝 놀랐다. 이를 본 타다요시가 눈물을 흘리면서 설명했다.

“주군이 성장하셨을 때를 대비하여 적의 눈을 속여 가며 비축한 것입니다. 장차 이것을 기초로 재기하여 훌륭한 영주가 되십시오. 그것만이 이 노신의 희망입니다”

감격한 다케치요는 타다요시의 손을 잡고 울었다고 한다. 곤궁 속에서도 충성으로 일관하는 미카와 무사의 심정을 잘 말해 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흔히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주군에 대해 절대적 충절을 요구하는 무사도는 훗날 에도(江戶)시대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후다이’

전국시대의 무사는 거취의 자유, 주군을 택할 권리를 폭넓게 가지고 있었다. 도쿠가와(다케치요)의 가신들도 전국의 무사니만큼 궁핍과 굴욕을 참지 못해 새로운 주군을 찾아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속하여 주군의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 충절을 다했다. 바로 이 점에 미카와 무사의 특이성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천하를 손에 넣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각지의 영주들을 후시미(伏見)로 불러 주연을 베풀 때의 일이다. 히데요시는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 등을 자랑하면서 영주들에게 어떤 보물을 소장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자기 차례가 왔을 때 이에야스는, “저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미카와의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진귀한 서화나 골동품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저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충용무쌍한 가신이 500명 정도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가장 큰 보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에 히데요시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그대는 행복한 사람이오. 나도 그런 보배를 갖고 싶소” 라며 부러워했다.

이에야스의 충용무쌍한 가신이란 미카와의 ‘후다이(譜代)’, 즉 대를 이어 도쿠가와 가문을 섬겨온 가신을 말한다. 그들은 전국시대를 통틀어 유례가 없을 만큼 결집력과 충성심이 강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에야스도 결코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그러한 후다이가 없었기 때문에 정권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큰 고초를 겪었다.

미카와 후다이의 결집력과 충성심은 난국을 살아오는 동안에 배양된 것이다. 어린 주군 이에야스가 인질이 되고 도쿠가와의 영지와 가신이 독립성을 잃고, 이마가와의 지배를 받은 상황이 그들의 분발을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성묘를 끝내고 슨푸로 돌아온 다케치요는 이듬해 1월 관례(冠禮·결혼)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모토야스(元康)’로 이름을 바꾸었다. 모토야스는 슨푸의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義元)의 조카딸과 혼인했다. 이 결혼에는 요시모토의 속셈이 깊이 작용했다.

즉 모토야스(이에야스)를 일족의 여자와 결혼시킴으로써 마쓰다이라 가문을 이마가와 가문에 동화시키려 한 것이다. 이대로 갔다면 모토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의 한 무장으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1560년 운명은 그를 전혀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이 해 5월 요시모토는 숙원이던 패권 장악을 위해 수도인 교토를 향해 대군을 동원했다. 이때 그는 그 길목인 오와리(尾張)에 있는 오다 군을 공격하기로 하고 이에야스를 불렀다.

모토야스(이에야스)에게는 당연히 위험한 선봉을 맡겼다. 모토야스가 오다의 영내 깊숙이 진입하여 마루네(丸根) 성채를 함락한 것은 19일 아침. 이어 그날 중으로 가까이 있는 오타카(大高) 성에 들어가 요시모토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다음 명령이 도착하지 않았다. 구쓰카케(沓掛)에서 오타카로 향하던 이마가와 군단의 주력부대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 오케하자마(桶狹間)의 산속에 접어들었을 때 오다 노부나가 군대가 기습공격을 해 요시모토를 죽였던 것이다. 불과 4000의 병력으로 1만 5000의 대군에 쾌승을 거둔 이 역사적인 전투로 27세의 노부나가는 순식간에 그 명성을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넌다

이 전투를 발판으로 하여 오다 노부나가는 패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말하자면 이 전투가 노부나가에게는 운명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이 전투를 전환기로 삼아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 또 다른 사나이가 바로 19세의 청년 이에야스였다. 이에야스에게 요시모토 군이 대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이튿날 저녁이었다. 이에야스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더욱 당황한 것은 가신들이었다. 가신들은 이러한 의견을 올렸다.

“머뭇거리고 있으면 이 성도 위험합니다. 속히 군사를 정비하여 오카자키로 돌아가야 합니다. 패전이 확실한 이상 이런 전초 기지를 지킨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고개를 저었다.

“경솔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싸움터에는 유언비어가 따르기 마련, 이것은 혹시 적의 모략인지도 모른다. 교란전술에 휘말려 성을 버리고 도망한다면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된다”

이때 숙부인 미즈노 노부모토(水野信元)가 사람을 보내 역시 요시모토의 패배를 알려왔다. 숙부는 노부나가의 압력으로 마지못해 이번 전투에 이에야스의 적이 되어 참가했으나 이에야스를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조카의 안전을 위해 속히 철수하라고 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그것도 일축했다.

“여기는 싸움터, 숙부라도 믿을 수는 없다”

세 번째로 오타카 성에 달려온 것은 그의 중신 도리이 타다요시(鳥居忠吉)가 보낸 부하였다. 타다요시는 서신을 통해 전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즉각 철수하라고 권했다. 이때서야 이에야스는 마음을 결정했다.

그의 조심성은 오카자키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그는 성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의 다이주(大樹) 사에 진을 쳤다.

놀란 것은 성안에 있는 이마가와의 군사였다. 총대장이 전사한 이상 적진과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으면 위험하다. 속히 본거지인 슨푸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입성하지 않았다.

“우지사네(氏眞) 공의 지시가 없는 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이 그 이유였다. 우지사네는 요시모토의 아들이다. ‘의리를 지킨다’ 이것은 이에야스의 긴 생애를 통해 일관된 하나의 특징이고 처세 방법이었다.

오카자키의 장병들은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성을 비우고 슬그머니 도주하고 말았다. 그제야 이에야스는 입성했다.

“버린 성이니 주울 수밖에”

19세 청년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이고 조심성이었다.

미카와의 독립

요시모토의 죽음은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구속에서 해방되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곧바로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도리어 이마가와 군이 도주한 뒤 미카와의 최전선을 홀로 지키며, 요시모토 공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 복수전을 벌여야 한다며 오다 쪽의 성채를 닥치는 대로 점령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인 오와리까지 공격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보고 이에야스의 신의에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본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세우기 위한 제스처였을 뿐이었다. 실은 미카와에 있는 오다의 영지를 빼앗아 마쓰다이라의 영지를 확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행히 노부나가는 오와리 수비에 급급하여 미카와에 점점이 구축한 작은 성에는 관심이 적었다. 때문에 이에야스는 더욱 공격하기 쉬웠다.

요시모토가 죽었다고는 해도 그의 위협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에 대해 성실한 태도를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빈틈없이 슨푸의 내정을 정탐했다. 그 결과 우지사네가 전의를 상실하고 주색으로 날을 보낸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야스는 기회가 왔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노부나가가 이에야스에게 동맹을 제의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원래 신중한 이에야스였으나 이때처럼 신중했던 적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모처럼 손에 넣게 된 미카와 전토를 잃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아직까지도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이마가와의 우산 밑에 있을 것인가.

가신들은 대부분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했다. 오다에 비해 이마가와가 훨씬 더 강대하다는 것, 이에야스의 부인이 이마가와 혈족이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많은 가신들의 처자가 아직 슨푸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도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반대하는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우지사네보다 노부나가의 기량을 훨씬 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에야스는 어디까지나 실리를 중시하는 인물이다. 물론 의리도 존중하지만, 그의 의는 인정을 우선하는 감상적인 의리가 아니라 실리를 동반한 신의였다.

그는 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은밀히 노부나가와 손을 잡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종전대로 이마가와의 충실한 수족인 양 행동했다. 그리고 1563년 봄에 별안간 이마가와 쪽의 우에사토(上鄕) 성을 공격해 함락했다.

이때서야 우지사네는 속은 것을 알고 격분해 이에야스 부인의 아버지(장인)에게 자결을 명하고 인질로 남아 있던 이에야스 가신의 처자들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이 신경질적인 보복이 이에야스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복수전을 펼 구실이 생긴 것이다.

도발과 회유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과 단교를 선언하고, 이름마저 모토야스에서 ‘이에야스’로 바꾸었다. ‘모토’라는 이름은 요시모토로부터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독립선언이었다.

독립을 쟁취한 이에야스에게 가장 먼저 닥친 시련은 1563년 가을에 발발한 광신적인 불교 종단 잇코슈(一向宗)의 폭동이었다. 이 폭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에야스가 그들의 총본산인 조쿠(上宮) 사에 대해 과다한 식량을 징발했기 때문이었다.

잇코슈 신도들은 영주 못지 않은 조직과 군비를 갖고 있었다. 또 구원을 믿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단을 수호하겠다는 각오가 투철했다.

잇코슈의 폭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이 폭동은 통상적인 전투와는 달랐다. 연일 각지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한 탓에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쪽의 병력 소모가 많았다. 이에야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호족과 이마가와 쪽의 내응도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야스도 직접 창을 들고 싸워야 하는 긴박한 사태에 몰리기도 했다 한번은 폭도의 총탄을 맞은 것도 모르고 난전(戰)을 벌이다가 오카자기 성에 돌아와 갑옷을 벗었을 때 탄환 두 알이 땅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이에야스를 더욱 괴롭힌 것은 가신들 중에도 잇코슈 교도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가신들은 이런 혈투 중에도 이에야스에게만은 창을 겨누지 않았다. 그들은 이에야스를 만나면 도주했다. 용맹하기로 유명한 하치야 한노조(蜂屋半之丞)도 이에야스를 보고 도주했는데, 그러다 그를 추격해오는 것이 일반군사인 것을 알고 돌아서서 찔러 죽였다. 쓰치야 시게하루(土屋重治)도 폭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야스가 고전하는 것을 보자 죽어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주군을 돕겠다며 그를 지키다가 전사했다. 이렇게 이에야스에 대한 가신들의 충절은 신앙보다 강했다.

처절하기 짝이 없던 잇코슈의 폭동도 이듬해 2월, 6개월 만에 강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끝이 났다. 그러나 폭동에 가담한 무사들의 영지는 몰수되지 않았고, 사찰과 승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폭동 주모자를 처단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이에야스가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애당초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그 조건이란 폭동 진압을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지킨 것이 있다면 첫째 조항 정도였다. 자기에게 칼을 겨눈 가신이지만 관대하게 회유했다.

반란 세력을 해체시킨 후 이에야스는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갑자기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와 신도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이에 종단측이 약속위반이라고 항의했으나 이에야스는 “전에 들판이던 곳을 원상 회복시켰을 뿐”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조쿠 사에 대해 쌀을 과다하게 징수한 것은 이에야스가 일부러 도발한 것이라고 한다. 첫째 목적은 잇코슈와 그 신도의 일소에 있었다. 그러나 이 도발을 통해 영내에 잠재하는 반대 세력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과연 그때까지 지하에 숨어 이마가와 쪽과 내통하던 토호와 반대세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유일한 패전

이에야스는 그들을 소탕하고 동부 미카와로 군사를 보내 그들의 거점인 요시다(吉田) 성을 점령함으로써 미카와 전체를 통일하는데 성공했다.

미카와 통일은 대대로 품어온 염원이었다. 이에야스는 이것을 도발과 회유 양면작전으로 불과 4년 만에 달성한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리고 3년 후인 1565년, 이에야스는 조정으로부터 정3품 미카와노카미(三河守)라는 벼슬을 받고, 성도 마쓰다이라에서 ‘도쿠가와’로 바꾸었다. 그리고 당당한 다이묘(大名)의 반열에 올랐다.

미카와에 기반을 다진 이에야스의 다음 목표는 이마가와의 비옥한 영지였다. 그는 1568년 도토우미(遠江)로 진공을 개시하여 그해 겨울 히쿠마(引馬)를 점령하고 이듬해 5월에는 가케가와(掛川)를 공략해 우지사네를 이즈(伊豆)로 몰아냈다. 그리고 1570년에는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오카자키를 떠나 히쿠마로 옮겨, 그곳을 하마마쓰(浜松) 성으로 개명하고 적극적으로 이마가와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마가와의 영지는 당시 일본 최강인 고슈(甲州) 군단을 거느리고 있던 북부의 다케다 신겐(武田信玄)도 노리고 있었다. 신겐은 교토 부근을 장악한 노부나가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대립하게 된 것을 기화로, 아시카가를 옹립하여 반(反) 노부나가 전선을 형성한 후 그 선두에 서서 교토 진입을 꾀하고 있었다.

따라서 길목을 가로막고 있는 이에야스와 신겐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에 양군 사이에는 스루가(駿河)와 도토우미, 미카와 북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다 1572년 드디어 정면으로 맞붙게 되었다.

“5分의 승리가 최선”

이해 12월에 신겐은 4만 3000의 대군을 이끌고 도토우미에 침공하여 후다마타(二) 성과 요시노 성을 함락하고 하마마쓰 북쪽의 미카타가하라(三方原)에 진을 쳤다.

이때 하마마쓰에는 노부나가의 원병 3000이 도착해 있었으나 이들을 합해도 이에야스는 군은 8000에 불과했다. 작전회의에서 장수들은 이러한 전력의 차이를 이유로 성에 들어가 농성하자고 주장했다. 원군으로 온 오다의 장수들도, ‘겐신이 비록 싸움을 도발한다고 해도 결코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노부나가의 의향을 전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신중하던 평소의 태도와는 달리 강경히 출격을 명했다. 지금까지 패배한 적이 없는 30세 청년의 혈기였다.

이에야스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학익진(鶴翼陣)을 펼치고 겐신의 공격을 기다렸다. 이것은 병력을 횡렬로 전개시키는 대형으로 원래는 적보다 몇 배나 우세할 때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진형이다.

겐신은 이에야스의 포진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어린진(魚鱗陣)을 펼쳤다. 이것은 물고기 비늘을 겹친 것 같은 종대로, 진형 중앙부가 삼각형의 꼭지점처럼 돌출해 있다. 공교롭게도 이 대형은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에 맞서 결사적인 돌격을 감행할 때 쓰는 전법이다.

22일 오후 드디어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하고 있던 우익의 원군(이에야스를 지원하러 온 노부나가의 군)이 무너졌다. 이것을 본 신겐은 제2선, 제3선의 병력을 중앙과 측면에서 투입했다. 신겐의 전법은 노도와 같은 인해전술로 시작된다. 창과 칼로 무장한 보병대가 공격을 감행한 뒤 기마대가 돌격하여 적을 짓밟는 것이다.

결과는 이에야스 군의 처참한 패배였다. 이 싸움에서 이에야스 군은 1200의 사상자를 냈고 그 자신도 구사일생으로 하마마쓰 성으로 퇴각했다. 이 패배는 이에야스의 전생애를 통해 유일한 패배였다.

성으로 돌아온 그는 사방에 횃불을 밝히고 성문을 활짝 열어놓게 했다. 패주해 오는 아군을 맞이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추격하던 적은 무슨 계략이 있는 줄 알고, 부근에 불만 지르고 그대로 돌아갔다.

이에야스는 대패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날 밤 소총대를 조직해 신겐의 진지에 기습공격을 가했다.

‘패배한 채 군사를 거두면 적은 기세가 올라 또 다시 공격해올 것이다. 반드시 일격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여기에도 집요한 이에야스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 있다.

새로운 책략과 전법

겐신은 평소 ‘병법의 극치는 5부(分)의 승리를 최상으로 하고 7부를 중(中)으로 하며 10부를 최하’로 한다. 5부는 탄력을 낳고 7부는 게으름을 낳으며 10부는 오만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가 하마마쓰 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생각때문이었다.

이 전투가 끝난 뒤 신겐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멸망은 목전에 있다고 장담했지만 이듬해 4월 병을 얻어 진중에서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천명이었으나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에게는 그 이상의 낭보가 없었다.

이에야스는 신겐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가쓰요리(勝賴)와 대결했다. 이 싸움은 우선 쌍방 포섭작전으로 시작됐다.

신겐이 죽은 뒤 이에야스는 신겐의 전법을 본떠 계속 스루가를 공격했다. 그러는 한편 그 가신들을 포섭하여 내응을 얻어, 다케다 군의 중요 거점인 나가시노(長篠) 성을 함락했다.

이에 맞서 가쓰요리도 이에야스의 진영 깊숙이 첩자를 들여보냈다. 이에야스의 중신인 오가 요시로(大賀彌四郞)를 매수하여 이에야스의 정실 쓰키야마(築山) 부인과 밀통하게 하고, 전투가 벌어졌을 때 내응하도록 했다. 쓰키야마는 이에야스가 이마가와의 인질로 있을 때 혼인한 요시모토의 조카딸로, 그녀는 삼촌을 죽인 노부나가와 가문을 멸망시킨 이에야스를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음모는 미연에 발각되어 요시로는 극형을 당했다.

가쓰요리가 1만 5000의 군사를 거느리고 미카와에 침입한 것은 1575년 4월이었다. 그는 요시로의 처형을 알고 이를 갈며 500의 병력밖에 없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함락 직전에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 3만 8000이 달려와 성의 서남쪽 시타라가하라(設樂原)에 포진했다.

가쓰요리 군의 장수들은 우선 나가시노 성을 점령하고 여기서 지구전을 벌이자고 헌책했으나, 가쓰요리는 일축했다. 마카타가하라 전투 때의 이에야스처럼 주력끼리 맞붙어 대번에 적을 섬멸하려고 했다.

가쓰요리는 나가시노 성을 포위하기 위해 약간의 군사만 남기고, 시타라가하라에 전군을 진출시켰다. 가쓰요리 군의 전법은 여전히 인해전술이었다. 이에 대해 도쿠가와와 오다의 연합군은 지난번 패배를 거울 삼아 새로운 전법을 개발해 놓았었다. 즉 진지 전면에 호를 파고 2중 3중으로 대나무 울타리를 세워 기마대의 공격을 차단하며, 보병에 대해서는 총포대로 맞선다는 새로운 전법이었다.

21일 새벽 가쓰요리 군은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눈앞에까지 몰려온 돌격대가 울타리에 막혀 우왕좌왕할 때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의 3000 총포대가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하여 도주하는 가쓰요리 군은 연합군의 기마대가 유린했다. 그 결과 가쓰요리 군은 신겐 이래의 용장을 거의 잃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마침내 멸망하게 된다.

이 전투에 등장한 방책과 총포대를 이용한 새로운 전법은 노부나가가 창안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앞서 뼈아픈 패전을 경험한 이에야스가 노부나가에게 강력히 헌책하여 실행에 옮겨진 것이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똑같은 실패는 되풀이하지 않는 이에야스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 나가시노 전투였다. 이 전투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총포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놀라운 결단과 인내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의 동맹은 2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쌍방이 서로를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에 유지된 것은 아니다. 이용가치가 있었을 뿐, 그런 요소가 없어지면 이 동맹은 무의미해진다.

나가시노 전투를 통해 일본의 전술을 일변시킨 노부나가의 명성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패자(覇者)라는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이에야스도 나날이 관록을 더해 ‘천하 제일의 명장’이라는 평판까지 듣게 되었다.

천하의 주인은 두 사람일 수 없다. 여기서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충성도를 시험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이에야스의 장남 노부야스(信康)에게 출가시킨 자기 딸 도쿠히메(德姬)가 보낸 서신을 이용했다. 즉 ‘쓰키야마 부인이 우리 부부를 이간하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남편 노부야스에게 소실을 들이게 했다. 마님 자신은 다케다 쪽의 첩자와 정을 통하고 모반을 꾀하고 있으며, 여기에 노부야스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또 노부야스는 황음(荒淫)을 일삼고 내가 데려온 시녀의 입을 찢어 죽였다’는 등등….

노부나가는 이런 죄상을 이에야스에게 통보하고 모자의 처형을 명했다.

이에야스는 노부야스에게 씐 혐의만큼은 결코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 싸움터를 누비며 무장으로서 역량을 발휘해온 아들 노부야스를 냉철히 평가하고 앞으로 도쿠가와 가문을 계승할 수 있는 기량을 지녔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노부나가가 들이댄 문제는 노부야스의 기량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요컨대 노부나가를 택하느냐 노부야스를 택하느냐의 문제다. 다른 방법을 택할 여지는 없었다.

‘어쩌면 모자를 구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자를 구해낸다고 해도 지금까지와 같은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의 굳은 결속은 보장받을 수 없다. 노부나가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틀림없이 동맹자로서 이에야스에게 한계를 느끼고 이반을 획책할 것이다.’

이에야스 생애 중에서 이때처럼 고뇌하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그는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생각하고 생각했다. 생각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줄 알면서도 또 생각했다.

사흘이 지난 후 그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노부나가는 지금 내게 불신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 동맹의 앞날을 점치기 위해 큰 희생을 요구한 것이다. 내가 이 희생을 치르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는 태도를 결정할 것이다. 노부나가와 우리의 동맹은 가문의 존망을 좌우한다. 그러니 나는 노부나가를 택하고 노부야스를 버릴 수밖에 없다’

이에야스는 비정한 길을 선택했다. 결국 쓰키야마 부인을 1579년 8월29일에 처형하고, 며칠 후 노부야스에게는 할복을 명했다.

동맹자의 죽음

이에야스의 처자 살해는, 노부나가와 동맹을 유지해 도쿠가와 가문을 존속시키기 위한, 피나는 결정이었다. 이로써 이에야스에 대한 노부나가의 신뢰는 더욱 깊어져, 이에야스는 대망을 향한 탄탄대로를 걷게 되었다.

1581년 끊임없이 변경을 위협하던 다카텐신(高天神) 성을 공략하여 엔슈(遠州) 일대를 평정한 이에야스는 그 이듬해 3만 5000의 대군을 거느리고 새로 동맹을 맺은 사가미(相模)의 호조(北條) 군 3만과 함께 다케다의 영지로 진입했다.

천하무적을 자랑하던 다케다 군단도 호전적인 가쓰요리의 거듭된 출격으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백성들은 과중한 세납으로 원성이 높았으며 가신들도 크게 동요하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이를 아는 이에야스는 진격에 앞서 밀사를 보내 회유와 포섭을 시도했다. 그 결과 구노(久能), 에지리(江尻), 다나카(田中), 스루가 등 요새지의 성을 아무 저항도 없이 점령하고 본거지인 가이(甲斐)에 육박하게 되었다. 가쓰요리는 도주를 거듭하다, 이듬해 3월 자기를 따르던 33명의 가신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다케다 가문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고 스루가를 그의 영지로 삼도록 했다. 이로써 이에야스는 미카와, 도토우미와 함께 스루가를 영유하여 일약 70여 만 석의 다이묘(大名)로 성장했다.

이에야스는 1582년 정월, 답례를 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거성인 아즈치(安土)로 향했다.

노부나가는 20여 년 동안 충실한 이 동맹자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며칠 동안 향연을 베풀고 교토, 오사카, 나라, 사카이(堺) 등지를 유람하게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주코쿠(中國)의 모리(毛利) 일족을 토벌하기 위해 나가마쓰(長松)로 출동한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보내기 위해 교토로 올라갔다.

이에야스가 유람을 마치고 작별을 고하기 위해 교토로 향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6월2일 새벽, 교토의 혼노(本能)사에서 노부나가가 중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기습공격을 받아 자결했다는 것이었다.

급보를 받은 이에야스는 망연자실했다. 처자를 죽이면서까지 지켜온 20여 년의 맹약이 휴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금 영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불과 10여 명의 수행원이 있을 뿐이다. 당장 복수전에 나설 수도 없다. 잇따라 들어오는 보고에 따르면 미쓰히데의 반란 소식을 듣고 폭도로 변한 실직 무사와 토착민들이 혼란을 틈타 마구 살육을 감행한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에게 빼앗긴 선수

이에야스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키로 했다. 미카와로 가는 최단 코스인 이가(伊賀)를 지나 사건 이틀 후에 오카자키 성에 도착하여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열흘 뒤인 14일에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카자키 성을 출발했다.

가장 먼저 미쓰히데를 주살하는 자가 앞으로의 패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으로 유리해진다. 이에야스는 서둘렀다. 그는 오케하자마의 전투를 상기했다. 요시모토 급사를 계기로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노부나가의 죽음은 요시모토의 죽음보다 훨씬 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한발 늦었다. 6월 19일 그가 오와리의 나루미(鳴海)에 이르렀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자가 도착했다. “다카마쓰에서 모리 일족과 대치하고 있던 히데요시가 질풍처럼 군사를 되돌려 6월13일 미쓰히데 군을 야마자키(山崎)에서 섬멸하고 이미 교토 방면을 제압했다”고 사자는 통보했다. 이에야스가 군사를 일으키기 하루 전이었다.

만약 이에야스가 상경해 있지 않고 자기 영지에 있었다면, 미쓰히데를 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먼저 왔을지도 모른다. 천하를 손에 넣을 기회를, 변고가 일어난 날 하필이면 쿄토에 있었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이에야스는 대권을 히데요시에게 양보하게 된 것이다.

이에야스는 하마마쓰로 군사를 돌렸다. 그리고 이미 군사가 동원체제에 있는 것을 기회 삼아 영지 확장을 서둘렀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동요하는 그의 영지인 가이를 호조가 넘보자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워 점령하고, 다시 시나노(信濃)를 병합하여 5개 주, 138만 석에 달하는 판도를 가진 큰 다이묘로 성장했다. 여기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3만 4000이나 되었다. 이 시기 히데요시가 서부 일본을 제압한다면 이에야스는 동부 일본의 패권을 잡겠다는 기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야스가 동부에서 5개 영지의 경영에 부심하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중앙 무대에서 눈부신 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미쓰히데를 토벌한 지 보름도 지나기 전에 히데요시는 중신들을 오와리의 기요스(淸州)로 소집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선출했다. 이 자리에는 히데요시를 비롯한 시바타 가쓰이에(紫田勝家), 다키가와 카즈마스(瀧川一益),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 등 중신과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信雄), 삼남인 노부타카(信孝) 등이 출석했으나, 이에야스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동맹자이기는 했으나 가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좌장격인 가쓰이에는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추천했지만 히데요시는 이에 반대했다. 그는 혼노 사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은 장남 노부타다(信忠)의 어린 아들 노부히데(信秀)를 천거하여 출석자의 의견을 물었다. 장손을 후계자로 옹립해야 도리에 맞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히데요시의 주장이 채택돼 노부히데가 후계자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회의에 앞서 쓰네오키 등을 회유해 자기 편에 가담케 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적

후계자 결정에서 주도권을 잡음으로써 오다 정권의 계승자란 지위를 확보한 히데요시는 그해 12월 돌연 기후(岐阜) 성을 공격해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의 항복을 받아, 반대 세력의 결집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에는 시즈케다케(賤岳)에서 카쓰이에를 죽였다. 이때 노부나가의 삼남인 노부타카는 가쓰이에와 호응하여 다시 반기를 들었으나 패하여 할복을 명령받았다.

이어서 12월에는 그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아즈치 성보다 큰 오사카 성을 짓고, 인근 30여 영지의 다이묘들을 모아 충성을 맹세토록 했다. 이때 히데요시의 영지는 24개 주, 620만 석에 이르고 동원 가능한 병력은 15만 7000에 달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게도 장애가 있었다. 첫째는 노부나가의 차남으로 오다 가문의 실질적인 계승자인 노부카쓰이고, 둘째는 20여 년에 걸쳐 노부나가의 맹우였던 동부의 이에야스였다. 히데요시가 볼 때 범용하고 경박한 노부카쓰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은연중에 실력을 쌓아나가는 이에야스는 방심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대결하지 않으면 안될 숙명적인 라이벌이었다.

천재적인 모략가 히데요시는 눈엣가시인 이에야스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조정에 주청하여 ‘정3품 참의(參議)’라는 위계를 그에게 내리도록 했다. 히데요시보다 높은 벼슬이었다. 그러나 실리주의자인 이에야스에게는 이 회유가 통하지 않았다. 한 치의 땅만도 못한 그 따위 벼슬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회유에 실패한 히데요시가 이번에는 노부카쓰 주변에 모략의 손을 뻗었다. ‘히데요시가 노부카쓰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소심한 노부카쓰는 그 소문을 믿고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견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이에야스 정도 되는 인물이 히데요시의 움직임을 그냥 보고만 있었을 리 없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의식하고 노부카쓰를 도발했듯이, 이에야스 역시 히데요시를 적으로 보고 암암리에 노부카쓰를 부추겨 싸움으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이에야스는 그 전부터 첩자를 잠입시켜 히데요시측의 정보를 자세히 탐지하는 한편, 평소 왕래가 잦은 반(反) 히데요시 세력과 밀약을 맺고 있었다. 유사시에는 이에야스의 궐기에 호응하여 동부와 남부에서 오사카를 견제하고 협공하자는 원대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노부카쓰가 이에야스에게 구원을 청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1584년 3월7일 이에야스는 ‘노부나가 공의 유아 노부카쓰의 위기를 구하기 위한 의로운 군사’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하마마쓰 성을 출발했다. 그러자 히데요시도 이를 공공연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출병을 명하고, 11일에 고노미(近江)의 사카모토(坂本)까지 진출했다.

용과 호랑이의 대결

전투는 그달 중순 히데요시 쪽의 이케다 쓰네오키가 오와리의 이누야마(犬山) 성을 점령함으로써 불이 당겨졌다. 그때 이세(伊勢)로 향하려던 이에야스는 방침을 바꾸어 나고야 북방의 평야에 혹처럼 돌출해 있는 고마키(小牧) 산에 포진했다. 그리고 적의 전진기지인 하구로(羽黑)를 급습하여 적을 쫓아냈다.

히데요시는 하구로의 패보에 접하자 직접 대군을 이끌고 이누야마 성으로 달려와 고마키에 대항하기 위해 각처에 요새를 구축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히데요시 군의 10만에 대해 이에야스 군은 1만 8000에 불과했으나 지리상의 이점이 있었다. 또 주변 백성이 게릴라가 되어 첩보원 노릇을 했기 때문에 크게 도움을 받았다.

양군은 반 달 동안이나 대치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야전의 쌍벽’이라 불리는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인지라 상대의 전술을 다 알고 있어 쉽게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장수 중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러한 교착상대를 타개해, 공을 세우려고 초조해 하는 자가 있었다. 쓰네오키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에야스를 고마키에 못박아두고, 그 사이에 미카와를 공격한다. 배후를 찔린 이에야스가 당황하여 철수하면 남아 있는 노부카쓰를 공격해 오와리를 쉽게 제압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작전이었다. 히데요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 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이 집요하게 주장하고, 더구나 그의 조카인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마저 자기가 이 작전을 총지휘하겠다고 나섰다.

히데요시는 할 수 없이 신속한 요격행동을 취하라는 단서를 붙여 이를 허가했다.

4월6일 밤 쓰네오키를 선봉으로 한 1만6000의 요격대가 어둠을 뚫고 진격했다. 이들은 아무 충돌 없이 9일 새벽 후지시마(藤島) 부근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이에야스의 이와자키(岩崎) 성이 있었다. 성병(城兵)은 300도 안 되는 소수였으나 그들은 용감히 대군에 도전했다.

쓰네오키는 이런 작은 산성 따위는 처음부터 묵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유탄이 그의 말에 명중하여 쓰러졌다. 쓰네오키는 분개하여 이성을 잃었다. 그는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말고 신속히 행동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잊고 전군에 이와사키 성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선봉이 성을 공격하고 있는 동안 제2대, 제3대, 제4대는 전진이 차단되어 각각 후방에 주둔, 전황을 살피게 되었다.

한편 이에야스 군은 사방에 내보낸 첩자로부터 유격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에야스가 직접 1만의 군사를 지휘하여 4500의 미즈노 타다시게 군과 함께 추격에 나섰다.

9일 새벽 미즈노 군은 노부요시의 군사가 나가쿠테(長久手) 부근에 주둔한 것을 알고 이를 급습했다.

쓰네오키가 겨우 이와자키 성을 함락하고 잠시 방심하고 있을 때 이에야스 군이 돌입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쓰네오키가 군사를 돌려 나가쿠테 분지로 진격했다. 그러나 한때는 공세를 취했던 유격대도 이에야스의 본진이 측면으로 공격해 오자 대번에 무너지고 쓰네오키는 전사했다.

히데요시에게 패보가 전해진 것은 그날 정오 무렵이었다. 그는 서둘러 군사를 급파했으나, 이에야스 군은 이미 철수하고 난 다음이었다.

수면하의 싸움

나가쿠테의 패전 후 히데요시는 더욱 신중해져 5월에 접어들자 드디어 전군을 미노로 철수시켰다.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전면공격을 피한 것은 과연 히데요시다운 노련함이었다. 그는 기후, 오가키(大垣) 등으로 전진하면서 노부카쓰의 성을 연쇄적으로 공격했다. 마치 나가쿠테의 패전을 설욕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것은 이에야스를 유인하기 위한 도발행위였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오와리에서 나오지 않고 자중했다. 히데요시의 유도작전에 말려들까봐 경계했던 것이다.

그후 전장은 이세 방면으로 옮겨졌다. 소규모의 충돌이 있기는 했으나 대세에는 영향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드디어 방침을 변경하고 이에야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교묘한 수법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 11월 노부카쓰를 회유하여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것이다. 이에야스는 분개하여 노부카쓰의 경솔함을 나무랐으나 이미 강화를 맺은 다음이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명분을 잃고 말았다.

물론 히데요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노부카쓰와 강화하는 게 아니라 이에야스와 화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영지로 돌아가자 집요할 정도로 여러 가지 술책을 강구하여 이에야스와 접촉을 시도하며 강화를 요구했다.

그러는 한편으로 친(親) 이에야스 세력을 각개 격파하는 수단을 썼다. 그리하여 1585년에는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와 엣추(越中)의 사사 나리마사(佐佐成政)의 항복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에야스의 세력권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후다이 중에서도 최고 원로인 이시카와 카즈마사(石川數正)마저 끌어들였다.

카즈마사의 배신은 이에야스 진영에 큰 충격이었다. 내부분열의 조짐이 보이더니 결국 나가쿠테 전투에서 공을 세운 타다시게와 마쓰모토의 성주가 이탈했다.

이에야스는 가신의 결속 강화와 영내 통치의 개선을 통감하고, 즉시 카즈마사가 수비하던 오카자키 성으로 들어가 임전 체제를 폈다. 병력의 동요를 진정시킨 뒤 오와리와 접경 지역에 있는 미카와의 여러 성에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병력을 재배치하고 군법까지 개정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수면하의 대치에 먼저 손을 든 것은 히데요시였다. 그는 동부지방에만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수 없었다. 규슈 평정이라는 대사업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규슈에 가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지 이에야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규슈를 평정하는 습격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런 때에 양쪽의 조정 사절로 노부카쓰가 이에야스를 찾아왔다. 히데요시는 그를 통해 어떤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대등한 위치에서 강화하기를 원한다고 전했다. 이에야스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강화에 응했다. 1586년 정월의 일이었다.

강화의 조건

그러나 이에야스는 여전히 완고하게 자기 자세를 견지했다. 화의에는 응했으나 상경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초조했다. 이에야스가 상경하여 신종(臣從)의 예를 올리지 않으면 화의를 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오다의 판도를 상속하여 중앙정권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에야스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에야스라는 존재와 그 향배를 무시한 채로는 천하통일이라는 대사업을 할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새로운 수단을 강구했다.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 있는 44세의 여동생 아사히히메(朝日姬)를 강제로 이혼시켜 이에야스의 정실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여전히 이에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한 이에야스에게 히데요시는 마지막 카드로 늙은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다. 히데요시는 효자로 알려져 있던만큼, 이것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라 해도 좋았다.

이렇게 되자 이에야스도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천하를 호령하는 간파쿠(關白)란 최고의 벼슬에 오른 히데요시가 이렇게까지 애걸하다시피 하게 만든 것은 이에야스의 무게를 천하에 알리는 것이 된다.

이에야스는 1586년 10월26일, 6만의 군사로 대형을 편성하고 당당히 서쪽으로 향했다. 오사카에서 그를 맞이한 히데요시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직접 마중 나가 이에야스의 손을 잡고 감사의 뜻을 표하며 그가 벗어놓은 신을 가지런히 놓는 등 신경을 썼다.

이튿날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에 들어가 여러 장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종의 예를 올렸다.

이에야스는 지난 3년간에 걸친 히데요시와의 대결을 깨끗이 청산하고 그의 천하통일 사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야망을 버린 것은 아니다. 대망을 가슴 깊이 숨기고 우선은 한 다이묘로서 히데요시에게 신종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 생각한 것이다.

돌이켜볼 때 고마키 나가쿠테의 싸움은, 전투 그 하나만 보면 이에야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전쟁은 총력전이다. 무력 외에도 정치, 외교, 경제 등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야스는 국지전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으나 대국적인 ‘전쟁’에서는 오히려 통렬하게 일격을 당했다. 노부카쓰가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음으로써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의 수호’라는 명분을 잃게 된 것이다. 고립작전 때문에 내부 붕괴의 조짐을 맞았다. 또한 임전체제를 강화하는 바람에 영민들은 세납과 부역이 가중되어 농촌경제가 위험수위에 다다랐다.

형세 판단에 밝은 이에야스가 이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신겐이나 노부나가 등 무력 일변도인 지도자와는 다른, 군사와 외교를 융합한 노련한 책략가 히데요시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이에야스의 특징은 인내라고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눈에 띄는 것이 재빠른 행동력이다. 상경해 히데요시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돌아간 그는 재빨리 지금까지의 거성이던 하마마쓰 성을 나와 12월에 스루가로 옮겼다. 이것은 교토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겠다는 의미로, 히데요시에 대한 복종을 뜻한다. 상경에 대한 미련을 두고 있으면 의혹을 살 우려가 있다.

히데요시는 크게 만족하고 이듬해 3월 규슈의 시마즈(島津) 정벌에 나서, 불과 5개월 반 만에 규슈 전토를 평정하고 개선했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상경해 히데요시의 개선을 축하했다.

규슈 평정 뒤에는 당연히 동쪽으로 시선이 간다. 하코네(箱根) 너머는 아직 히데요시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광대한 처녀지다. 그중에서도 간토 전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호조 우지마사(北條氏政)- 우지나오(氏直) 부자가 가장 강적이었다. 그들은 1582년에 이에야스와 화해하고 이에야스의 둘째 딸을 우지나오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따라서 히데요시가 이 두 강호의 유대에 쐐기를 박지 않을 리 없었다.

사돈과의 전쟁을 자청한 이에야스

호조에게 창을 겨누면 이에야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것은 히데요시로서는 반드시 해야 할 시험이었고 이에야스도 각오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1588년 4월, 히데요시는 지난해 준공한 오사카의 저택으로 천황을 초청하고 그 자리에서 여러 다이묘에게 간파쿠(히데요시)의 명령은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물론 이에야스도 참석하여 서명했다. 그러나 호조는 참석하지 않았다.

히데요시가 사자를 보냈지만 호조는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군비를 확충하고 군사를 증강시켰다. 이것은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히데요시가 동원령을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야스가 호조에게 번의(飜意)를 촉구하는 사자와 서신을 보냈는데도 성과가 없었다. 이에야스는 말로만 번의를 촉구하는 것은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히데요시로부터 ‘화평을 위장하고 실은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하려고 획책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그런 의혹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에 그는 곧바로 상경해 호조 토벌군의 선봉을 자청했다. 스스로 막대한 군사비를 투입하여 10만의 대군과 300척의 배를 이끌고 호조의 거성이 있는 오다와라(小田原)로 향했다.

오다와라 전투가 벌어진 것은 1590년 7월이었다. 성을 지키는 호조 군은 3만 5000, 이를 포위한 히데요시 군은 무려 30만. 그야말로 들판을 덮고 골짜기를 메운 대접전이었다.

호조 측은 적은 대군이므로 지구전으로 나가면 식량공급이 어려워 자멸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육로와 해로를 충분히 정비하여 보급로를 확보한 히데요시의 완벽한 수송작전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도리어 보급의 어려움은 자신에게 있었다. 히데요시는 주위의 작은 성채를 모두 파괴하여, 본성(本城)과의 연락을 차단하는 ‘말려

Posted by tornado
|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작성자 : harrywoon, 등록일 : 2004-09-11 14:55:52
여기저기에선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의 부모님이 죽는다, 그 사람이 죽는다 등 여러 소문, 이야기가 떠돌고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시중에도 붉은색으로 이름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들은 붉은색이 피를 상징한다느니 하며 저마자 의견을 내놓지만 사실 진짜 그 이유는 재미있..
내용 전체보기
Posted by tornado
|

 
Posted by tornado
|
 
그는 던젼으로 향한다
고랩이 되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_-;;
 
 

Posted by tornado
|